서양의학 수용

제2장 서양의학의 소개와 수용

실학자들의 서양의학 소개

근대 서양의학의 본격적 보급은 개항(1876년) 이후부터지만 처음으로 서양의학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실학자들이었다. 실학자들이 중국에서 간행된 한역 서학서나 서양 의술서를 읽고 자신들의 저서에 기술함으로써 서양의학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익(李瀷:1681~1763)은『성호사설(星湖僿說)』 서국의(西國醫)에서 서양의학의 생리학 분야와 서양의사에 대해 소개하였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서양의 생리학적 지식을 이용하여 전통적 자연관과 한의학 이론을 비판하였으며, 스탠튼의『신증종두기법상실(新證種痘奇法詳悉』을『마과회통(麻科會通)』의 부록에 실어 우두법을 소개하였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열하일기(熱河日記)』에 당시 중국에서 효험이 있다고 알려진 네덜란드의『소아겸험방(小兒經驗方』과『서양수로방(西洋收露方』을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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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경과 최한기는 생리적 측면과 함께 인체의 해부학적 근거를 탐구했다. 이규경은『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인체내외총상변증설(人體內外總象辨證設)에서 아담 샬의『주제군징(主制群徵』을 인용하여 인체 해부와 생리적 기초를 밝혔고, 종두변증설(種痘辨證設)에서는 종두법을 기술하였다. 최한기(崔漢綺:1803~1875)는 해부학에 기초한 서양의학의 이론과 방법을 극찬하면서도 한의학의 처방과 약재를 통해 서양의학의 부족을 메울 수 있다는 동서의학의 절충설을 주장하였으며, 중국의 한역 의술서를 바탕으로 서양의 내과 외과 소아과 치료술 등 의학의 분야를 다룬『신기천현(身機踐驗)』을 저술했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소개된 서양의학은 개인적인 관심에 머물렀을 뿐 사회전반의 인식과 수용으로 확산되지는 못하였으나 후대 서양의학을 받아들이는 데 기반이 되었다.

조선정부의 서양의학 수용

개항 이래 부국강병과 전염병의 해결이 가장 큰 과제였던 조선정부는 일본에 수신사와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여 우두법 위생사업 병원 등의 근대보건의료를 접하게 되었고, 개항장에 세워진 일본인의원 등을 통해 서양의술의 우수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근대적인 보건위생 방법과 제도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과정에서 전통의료기관인 혜민서와 활인서가 혁파되었다. 조선정부는 한성순보(漢城旬報)를 통해 서구의 위생 및 의료제도를 소개하면서 서양의학교육의 필요성도 홍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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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지석영(池錫永:1855~1935)은 한국 최초로 우두법을 실시했다. 부산의 해군병원인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종두법을 익혀 성공한 후 조선정부의 파견으로 일본 의생국에서 종두법 관련의 제반 기술을 배우고 귀국하여 국내에 보급했다. 조선정부는 1882년 전라도와 1883년 충청도에 우두국을 설치한 후, 1885년 우두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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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 설립되었다. 미국인 선교의사 알렌은 1884년 갑신정변에서 부상당한 민영익을 성공적으로 치료한 계기로 조선정부에 병원의 개설을 건의하였다. 근대 병원의 설립을 구상하고 있던 조선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근대 서양식 병원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하였다.